보성시장이 개장하던 1972년. 중앙닭집의 김순열 어르신(1940년생)이 처음부터 닭집을 한 것은 아니었다. 뜻이 맞는 사람들과 함께 어물전을 시작하기로 했고 지금의 중앙닭집 바로 맞은편 점포를 얻었다.“처음에는 너이가 동업해서 생선 장사했어. 9년 정도 했을 거야. 좋은 생선 가지고 와서 팔고 싶어서 새벽마다 부두로 나갔어. 애들 아빠는 성산포에 옥돔 사러 가고 나는 모슬포까지 자리돔 사러 가고. 버스 타고 다녔어. 꼭 내 눈으로 보고 사야 마음이 편해. 바다에서 막 올라온 좋은 생선 보면 어찌나 기분이 좋은지. 엿날에는 그 모슬
빗상외를 맞추러 자주 가는 보성시장의 한 빵집이 있다. 유독 그날은 아침부터 종일 아무것도 못 먹고 일을 했던 날이라 보성시장 건물에서 빠져나오는 배지근한 음식 냄새에 무엇인가에 홀리듯 시장 안에 들어갔다.코를 찌르는 순대국밥 냄새와 고기국물 냄새. 그러고 보니 이십여 년 전 대학 시절 체육대회, 대학 행사 후 이 보성시장 순댓국밥집에서 뒤풀이하러 우르르 몰려왔던 그 시절 이후로 보성시장 건물 안으로는 처음 들어왔다는 사실에 새삼 놀랐다. 최근 건물의 바닥 타일 공사를 다시 한 듯했지만 그 외의 모습과 분위기는 이십여 년 전과 크게
“여기 산지천이 옛날에는 4층, 5층 집이 저 아래 항까지 있었어. 지금의 산지천이 없었지. 중간에 뜯어가지고 복개천으로 만들었지. 복개천을 산지천으로 만들었었어. 내가 그것까지 다 봤으니까. 나는 50년은 채 안 되어도 오래오래 여기 국숫집 했지. 다른 일 뭐 해볼까 하고 생각할 뭣도 없었어. 다른 일 하지도 않고 나는 지금껏 쭉 이 일만 했어.”1945년생 부옥자 어르신의 국숫집은 옛 제주 패션의 메카이자 동양극장이 있었던 동문시장(주)에 자리 잡고 있다. 1965년 동문시장(주)이 지금의 건물에서 문을 열었을 때 동진식당도 함
“나는 1964년에 가야호 타고 제주 왔어. 너희는 가야호 알아? 지금 애들은 모르지. 그때 제주 와서 나는 지금까지 쭉 남수각을 벗어나 본 적이 없는 사람이야.”전라남도 진도 출신인 부옥자 어르신은 호적상 1945년생이라 하셨지만, 이 시대 어르신들이 그러셨듯 실제 태어난 해보다 두 해 늦게 호적에 올라갔다. 어르신의 목소리는 전라도 억양이 옅게 깔려 있으면서도 그 위로 특유의 제주 억양이 짙게 눌려 있었다. 제주 사람이 아니면 쉽게 낼 수 없는 억양. 알고 봤더니 어르신의 친할아버지가 제주 출신이란다. 아 그래서 어르신의 제주말
갓 태어난 막내아들을 업고 동문시장에서 노점상을 시작한 박동례 어르신(1952년생).아무 연고 없이 제주로 내려와 장사하려니 수완도 없었고 어린 아들을 안고 다니며 장사해서 고생을 이만저만 한 게 아니었단다.사실 고생하는 것은 그 시절 누구나 그렇게 살았던 세대이기 때문에 어느 정도 감내할 수 있는 부분이었다. 그렇지만 유독 살을 베이는 것 같은 제주의 칼바람 추위는 어르신에게 고역이었다. 추위에 몇 년 동안 무방비로 있어 그런지 그때 골병이 든 것 같다고 하셨다. 그리고 몇 년 후 시장 안에 슈퍼마켓이 들어왔다. 슈퍼마켓에 진열된
가만히 앉아 있어도 등에서 땀줄기가 흐르는 끈적끈적하고 무더운 여름, 한여름의 공기는 마치 한증막에 앉아 있는 것같이 숨이 턱 막힌다. 시원한 쉰다리 한 잔이 절실하게 생각나는 계절, 나는 쉰다리에 쓸 누룩을 사러 4년 전부터 지금까지 쭉 다니던 단골집으로 향했다.제주 최초 백화점식 시장인 주식회사 동문시장과 동천마트 사이로 호떡집들이 즐비하게 늘어서 있다. 너무 더운 시기라 그런지 잠시 문을 닫고 있는 포장마차가 훨씬 많았다. 과거에는 호떡이나 빙떡이 아닌 패션 잡화들을 파는 골목이었다. 동문재래시장으로 들어가는 1번 게이트. 소
서문공설시장의 작은 순댓집, 진경순대의 고군자 어르신(1940년생, 구좌읍 평대리 출신)께서 순대를 만들어 팔아보겠다고 처음 생각한 시기는 어르신의 나이 26세였다. 어르신이 만든 순대는 맛이 좋아 입소문이 퍼졌다. 동문시장에도 보내고 식당에서도 어르신의 순대를 받고 싶어 했다. 하지만 처음부터 어르신이 지금의 순대 맛을 잡은 것은 아니었다. “스물다섯 넘고 83년 진경순대 하기까지 누구를 뵙지도 않고 누구에게 보여주지도 않고 나의 생각대로 만든 거야. 어떵하면 (최고의 순대로) 도달하게 맛있게 할까. 이 직업이라는 것이 얼른 설르
서문공설시장의 한 점포. 시장을 둘러보면 이 시장에는 유독 순대를 파는 곳이 많다. 그중 몇 년 전부터 내 눈에 들어온 한 순댓집. 끊임없이 단골처럼 보이는 손님들이 순대를 사는 것도 그렇거니와, 손님들을 맞이하고 있는 어르신에게 눈길이 갔다.관광객처럼 보이는 20대 여성의 손님이 순대를 사고 있어서 나는 그 손님 분께 여행하러 오신 김에 오신 것인지 물었다.“아뇨, 여긴 저희 부모님 때부터 좋아했던 곳이에요.”반전처럼 돌아온 대답. 나는 그 여성분과 얼굴에 연신 미소를 잃지 않고 순대를 썰어서 포장하는 순댓집 어르신을 얼굴을 번갈
정옥제과가 서귀포매일올레시장에 자리 잡은 지 50여 년. 그 가운데 김경자 삼춘의 손길이 닿은 지는 40년을 넘기고 있다. 처음부터 삼춘이 빵을 만들었던 것은 아니었다. 앞선 글에서 기술했듯이 빵 기술자였던 남편은 빵을 만들고 삼춘은 홀을 봤다. 그런데 술을 좋아했던 남편이 일찍 일어나 출근해야 하는 이 일의 특성상 늦잠을 자버려서 지각을 하는 경우가 종종 있었다. 지각을 하면 남편보다 김경자 삼춘이 되려 주인할머니의 눈치를 봤고 싫은 소리도 듣기 싫었다. 1988년, 삼춘은 본격적으로 남편에게 빵을 배우기 시작하면서 주방에서 빵을
산남지역의 대표 상설 전통시장인 서귀포매일올레시장(올레시장)은 제주를 사랑하는 관광객들과 외국인들로 늘 북적이는 곳이다. 제주의 음식 문화와 생활사, 산업의 변천사를 보여주는 가장 생생한 공간이 시장이라 서귀포로 넘어 올 기회가 있다면 꼭 찾는다. 제주시 동문시장과는 사뭇 다른 정취와 방문객들의 표정도 조금은 차이가 있다. 지역민들이 찾는 전통시장이 관광시장으로 변모하면서 서로 나누던 정과 정겨움이 사라졌다며 아쉬움을 토로하는 분들도 계시지만, 시장 구석구석 천천히 걸으며 하나씩 살펴보고 있노라면 아직도 서귀포지역 ‘로컬들’의 이야
나는 김임자 어르신(1942년생)께 ‘많은 사람들이 어르신의 식당을 좋아하는 이유가 무엇인 것 같냐’고 여쭈어보았다.“나는 장사는 신경 안 써. 요즘 사람들 세대는 어떻게 하는지 모르겠지만 나는 음식은 한 번 와서 맛있고 또 한 번 와서 맛있고. 이렇게만 (손님들이 느끼게만) 하면 돼. 맛 변하지 않고 간세부리지 말고 해야 돼. 몸국이 다시가 나빠가면 다시물 다시 우릴때가 왔다. 닥쳐서 하지 말고 미리 미리 해야 돼. 한번은 맛있고 한번은 맛없고 들쭉날쭉 하믄 절대 안 돼. 그래서인가 어떻게 제주시에서도 많이 오고 성산포에서도 오고
대정읍 모슬포시계탑 거리에 조그만 식당이 하나 자리하고 있다. 평범해 보이는 작은 식당처럼 보이지만 외관에 유난히 내 눈길이 계속 갔다. 그 이유는 ‘Since 1954’ 때문이었다. 올해로 70년을 맞이한 이 조그마한 식당에 내가 첫발을 들여놓은 것은 2019년 9월 즈음이었던 것 같다.무더운 여름의 끝이 무섭게 기승을 부리고 있을 때, 고기국수를 시키고 음식이 나오길 기다리고 있는데 동네 아저씨들이 식당에 우르르 들어오자마자 외쳤다.“어머니, 냉우동 줍써.”어라? 방금 본 메뉴판에 냉우동이라는 메뉴는 보이지 않았는데 동네 삼춘들
내가 만난 테우리, 수망리 김창언 어르신(1946년생)께서 말씀해 주시길, 50여 년 전 당시 집집마다 테우리가 있지 않았다고 말씀하셨다. 대규모로 목축해야 테우리를 고용했는데 적어도 소 열 마리, 말 30~40필 정도는 되어야 했다. 특히 제주의 동쪽 땅은 농사를 지으려 해도 바람에 흙이 잘 날렸고, 겨우내 흙이 올라와 뜬 땅을 봄에 파종 전 눌러줘야 농사가 된다고 설명해 주셨다. 소나 말을 데리고 와 그 땅을 밟아주는 사람이 테우리였고, 어르신은 그걸 “동네 와서 밭 볼린다”라고 표현하셨다. 육지 사람을 고용해서 테우리를 쓰는
“이 고사리는 배미고사리. 우리 수망리 사람들은 잘 안 먹는데 육지에서는 잘 먹기도 합니다.”수망리의 김창언(46년생) 어르신을 처음 뵈었던 날, 나는 이제껏 한반도 만나보지 못했던 고사리를 마주했다. 고작 고사리꺾기 6년 차인 나는 처음 보는 배미고사리에 보물찾기에서 보물을 발견한 듯 신이 났다. 고비라는 이름이 있지만 뱀이 또아리를 튼 것처럼 보여 수망리 사람들은 배미고사리라 부른다고. 우리가 흔히 백고사리(볕고사리)와 먹고사리로 구분하는 두 고사리를 마을에서는 촐왓고사리와 가시덤불 고사리라고 부른다고 하셨다. 제주시민속오일장에
“허리 수술하고 4개월 정도 되신가. 오늘 첫 물질 다녀왔는데 오늘 솜(말똥성게) 해당 메역넣고 끓인 거라. 오분재기(떡조개)도 좀 해그네 넣고.”인터뷰 요청할 때부터 절대 집 안으로 들이지 않을 것 같았던 이희순 어르신의 댁에 들어가자마자 나는 가스레인지로 달려갔다. 가스레인지 위에 올린 냄비에 호기심을 갖고 있으니, 이희순 어르신 입가에 미소가 옅게 번지며 한번 먹어보겠냐며 식탁에 먹을 자리를 만들어주셨다. 그새 마농지까지 곁들인 메역솜국이 차려졌고 어르신의 부엌은 해녀삼춘의 코스요리를 선보이는 파인다이닝으로 바뀌었다.예전에 오
작년 10월, 한 방송국에서 해녀 음식을 주제로 다큐멘터리 촬영을 한다고 연락이 와 도움을 드리기로 했다. 우연히 좋은 기회에 평대리 해녀 삼춘들과의 인터뷰가 성사되었고 인터뷰는 다큐의 한 부분으로 들어가게 됐다. 방송용 카메라가 돌아가는 어색한 마을회관 안에서 처음 뵌 두 분의 해녀 삼춘들은 소파에 불편한 기색으로 엉거주춤 앉았고 나도 좀처럼 인터뷰의 물꼬를 트지 못해 어색한 분위기가 이어졌다. 인터뷰를 하겠다고 제주시에서 온 나를 혹여나 육지에서 온 사람으로 생각하시면 안되겠다 싶어 분위기를 빨리 깨려고 화제를 전환시켰다.“삼춘
하도리에서 만난 고홍임(출생년도 알 수 없음) 어르신의 군 이야기가 더 궁금했던 이유는 이러하다. 내가 알고 있는 헌병은 소위 헌병 모자를 쓴 군인 잡는 귀신 이미지였는데 어르신은 사복을 입었다고 하셨기 때문이다. 사진에서 보여준 군복을 입고 찍은 사진은 동료의 옷이라 하셨다. 어르신은 처음부터 수사관이 될 생각은 아니셨던 것 같다. 그런데 어느 날 중대장이 어르신을 불렀다. 두꺼운 책을 하나 주며 시험을 보라고 하셨는데 그 시험이 바로 군수사관이 되기 위한 시험이었단다. 당시에는 한자를 모르면 될 수가 없었다. 죄명과 관련법을 다
“어르신, 몇 년도에 태어나셨는지 알려주실 수 있으세요?”“나? 상대방이 마흔이면 나는 마흔 한 살, 쉰이면 쉰 한 살.”2:8로 넘긴 말끔한 백발머리, 172cm 정도의 늘씬하고 다부진 체격, 깊은 주름 사이로 뿜어져 나오는 독수리 같은 예리한 안광, 신발까지 올 블랙으로 단정하고 정갈하게 갖춰 입으신 착장. 댁에서 멀지 않은 인터뷰 장소에서 약배전(Light Roast)으로 볶은 게이샤원두로 내린 커피를 드시며 인터뷰를 시작한 어르신. 나는 하도리의 고홍임 어르신(출생년도 미상)이 내뿜는 아우라에 오늘의 인터뷰가 이제껏 내가 만
김현순 어르신은 스물두 살 혼인 이후에야 시어머니의 어깨 너머로 농사를 배우기 시작한다. 보통 어르신 세대의 아이들이라면 농사짓는 것을 보며 자라는 것이 일상인 경우가 많지만, 어르신께 농사는 익숙하지 않았다. 하필 뱃속에 첫 아이도 임신하고 있었던 때였다. 입덧도 심했던 터라 내 몸이 내 몸 같지도 않았다. 구름 위를 둥둥 떠다니는 것 같은 울렁거림 속에서 난생처음 마주한 농사는 낯설었다.“시집오자마자 얼마 되지 않아 딸을 임신했는데 시어머니가 과수원이랑 보리농사를 엄청나게 크게 하셨던 거라. 애들 아빠가 교사라서 남원초 발령받았
“왜 그렇게 불렀는지 모르겠는데 우리집 어른들은 나를 ‘행아’라고 불렀어. 고모부가 내 이름을 지어주셨다고 들었는데 우리집을 행아네 집이라고 하셨지.”남원읍 의귀리에 살고 계신 김현순 어르신(1949년생)의 집을 방문한 날, 알려준 주소를 따라 올레길 안으로 들어가니 끝자락에 동화 속에 나올법한 집이 펼쳐졌다. 동백낭(나무)으로 둘러싸인 넓은 마당에 목조로 지은 집이 두 채 있었고 너른 마당 한 켠에는 장독대들이 나란히 모여 있었다. 보통 이제껏 내가 만난 어르신들의 장독은 한 개 혹은 많아봤자 세 개 정도인데 어르신댁의 장독대는